천주교와 접하게 되고 한역서학서인 천주교서를 대할 수 있었다.
이런 만남은 17세기 초부터의 일이며, 그들의 손에 의해 한역천주교서가 조용하게 조선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받아들임이 1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는 가운데 국내의 선각적 지식인들은 이렇게 조선후기 사회로 도입된 한
.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 이론을 이야기 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유교사회의 집권자들에게는 마치 사회주의가 막 태동했을 때와도 같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만한 사상이었다. 『조선후기 유교와 서학』 금장태, 서울대학교 출판부
성교요지의 목적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가 그 복음의 접촉의 시작이 자국인에 의해서 경험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천주교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지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이다. 조선은 중국과 오랜 세월에 걸쳐 수교하고 왕래가 잦았으므로 조선인의 천주교에 대한 접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을
천주교 신앙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조선시대의 국가·사회조직에 대하여 결정적인 개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지식인에게 전통적인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자기반성을 하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또 조선후기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 천주교의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서학'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는 서양 문물에 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새로운 종교로서의 천주교를 뜻하기도 한다. 조선후기에 많은 사람이 접하였던 천주교와 과학 기술은 그 전래 과정과 영향을 고려할 때 서로 분리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조선에 들여왔으며,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가환 등은 명나라 학자이며 천주교도였던 이지조의 서책에 의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분위기는 천주교 실천 운동을 시작하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후기에 유,불,도교적 문화인 우리 나라 전통 문
국가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앙법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앙법이 조선후기에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의 적극적인 수리시설 관리로 인해 물 때문에 이앙이 실패할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이앙법이 노동력을 줄이는데 결적적인 역할을 한
천주교의 전래를 통해서 중국과 조선에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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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성결교회의 전래
성결교회 초기 전도자들의 전도방법은 예수님의 전도방법과 흡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는 교회설립을 찾아 볼 수 없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전도 역시 교세확장이나
조선의 독립은 불능하다고 판단하고 변절한 자들이다. 대표적인 이는 서춘, 박희도, 양주삼, 유진오 등이다. 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친일활동을 전개했던 인물들은 거의가 변절자가 아닌 직업적 친일분자들이다. 일제는 1930년대로 들어오면서 일체의 민족주의운동을 총독부 관제운동으로 흡